보수주의, 진보주의

by Jiondad posted Sep 0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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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1789년 7월. 프랑스 파리. 거리는 흥분한 시민들의 격정적인 외침으로 터져나갔다. 행렬의 맨 앞, 비틀거리는 창대에 꽂힌 것은 바스티유 감옥의 수비사령관이었던 드 로네의 머리였다.

 

이듬해인 1790년. 바다를 건너온 대혁명의 열풍이 온 런던을 휩쓸자, 목사였던 프라이스 박사와 런던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지지 모임을 보며, 한 인물이 장문의 글을 내 어 놓는다.

파리의 한 신사에게 보내는 서신의 형태로 된 이 글은 후일 보수주의의 바이블로 일컬어지며 역작에 반열에 오른다. 

아일랜드 출신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가 쓴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이다.

 

 

이 글에서 그는,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의 헌정제도, 그리고 혁명 전 프랑스의 체제인 구체제(앙시엥레짐)를 비교하며, 프랑스 대혁명의 문제점을 질타한다. 

버크가 보기에 프랑스 대혁명은, 새로 지을 건물에 대한 확실한 계획도 없이, 수세기를 지탱해 온 건축물을 쓰러뜨린 일이었다. 옳은 것(the right)과 좋은 것(the good)에 대한 고민없이,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파괴한 이 혁명은, ‘모든 종류의 죄악이 어리석은 짓과 더불어 뒤범벅이 된 괴상한 혼란’이었던 것. 

버크는 인간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대를 통해 모아진 민족의 지혜와 미덕의 총합인 제도들을 간단히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요즘식으로 말해보자면 집단지성과 시스템간의 승부에서 시스템의 손을 들어줬다고나 할까.

 

 

이 글의 말미는 프랑스 혁명의 종말을 비극적으로 예언한 버크의 통찰과 함께 끝을 맺는다.

 

 

“...한 권위는 취약하고, 모든 권위는 부침을 겪는 와중에...병사들의 호감을 얻을 줄 아는, 진정한 지휘자의 능력을 갖춘 민중적 장군이 출현할 것이다...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군대를 실제로 지휘하는 그 자가 당신들의 주인이 된다. 당신네 왕의 주인, 당신네 의회의 주인, 당신네 공화국 전체의 주인인 것이다.”

 

 

15년 후.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황제에 오른다.

 

 

 

보수주의

 

 

보수주의를 확정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쉽지 않다. 보수가 기존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켜야 할 가치인 옳은 것(the right)과 좋은 것(the good)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럼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좋은 것일까. 카피톨리노 언덕 위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카이사르에게 60여방의 칼침을 놓은 원로원파에게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이 지켜야 할 가치였다. 

종신 집정관에 올라 왕정을 꾀하던 카이사르는 폭군이자, 옳은 것과 좋을 것을 위해 타도해야만 하는 진보주의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 내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남기고 길로틴 위에서 목을 떨 군 루이 16세에게도 왕정은 지켜야 할 가치였다. 

베르사유 궁을 피로 물들이고 온 가족을 개처럼 끌어 파리로 압송하던 무시무시한 진보주의자 폭도들의 손에서 지켜내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진보주의가 인간의 무한의 가능성에 대한 낙관과 이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다면, 보수주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성보다 오랜 시간 걸쳐 쌓여온 사회적 전통과 경험을 더 중시한다. 

심지어 사회적인 편견마저 신뢰한다는 버크의 고백은 짐짓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면 이 있다.

 

 

“더욱 부끄럽게도, 그것이 편견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더 오래 지속된 편견 일수록, 더 일반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편견 일수록,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소중히 여깁니다...각 개인이 가진 이성의 양은 적기 때문에 오랜 세대에 걸쳐 축척된 사회적 지식들의 합을 활용함으로써 더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컨버팅 해보자면 보수주의가 가급적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상태를 유지하고 보전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면 진보주의는 체제 혁신적인 이념이다. 

현재의 상태를 개선하는데서 나아가 혁신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그런데 체제(가치)는 변한다. 보수주의를 상황에 따라 정의되는, 상황적(현상적)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일방적으로 현상의 유지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주의의 핵심은 전통이다. 보수주의가 지키는 가치의 전제는 옳은 것(the right)과 좋은 것(the good)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변화를 자제하는 것이 보수다.

 

이 전제는 다음으로 뻗어나간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을 버릴 수 있는 가.’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오토는 부유한 귀족 집 자제였다. Von 자 달린 귀족 아버지와 잘 나가는 외교관 집 딸래미던 엄마 사이에서 오토는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란다. 

유년시절 10계명 중 지킨게 하나도 없을 정도였던 망나니이자, 친구가 자기를 빼놓고 파티를 벌였다고 그 집 창문에다 총을 쏴댔던 이 전도 유망했던 성격파탄자는 

훗날 독일제국의 아버지라 불리며 유럽을 주름잡는 대 정치가가 된다.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다.

 

 

“...우리는 비평하기를 좋아합니다. 국회를 비판하는 일이 너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고, 지방에는 모반자 같은 이들이 혁명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문지상의 논설은 여론이 아닙니다...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것은 철과 피 입니다.”

 

 

문화승리나, 과학승리 따위는 필요없습니다. 빌드는 오로지 정복승리 뿐입니다(응??)는 삘의 저 유명한 연설을 낭독한지 1년여만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와의 연이은 전쟁에 돌입한다. 

1871년 프랑스와의 승전을 끝으로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빌헬름 1세는 독일제국 황제로, 비스마르크는 제국 재상에 취임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비스마르크는 세계최초의 사회보험을 입법시킨 장본인이다.

 

 

“...현존하는 사회적 폐단을 치유하는 방법은 단지 사회민주주의를 탄압하는 것만으로 척결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정책이 병행할 때 비로소 효과적일 수 있다.”

 

 

1881년 11월. 비스마르크가 제국의회에서 대독한 황제교서를 들어본 사람은 많지만, 그 몇년 전 그가, 사회주의자탄압법을 만들어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축출하고, 

황제암살미수를 빌미로 국민자유당을 협박해서 사회주의 정당을 불법화한 사실은 이제 시대의 뒤안길에 남겨져있다.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베를린에서 혁명적 소요가 일어나자, 혁명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사병을 소집했을 정도로, 비스마르크는 뼛속부터 귀족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노동자 계급을 무시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을 혐오했다.

 

훗날, 노동자를 위한 세계최초의 근대적 사회보험인 재해보험범, 질병보험법, 노령연금법의 제정 배경에 대해,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어, 국가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치안상태의 불안정을 피 하기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며 고백한 이 보수주의자가 정계은퇴 후 남긴 말은,

 

 

“내가 만약 정치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나는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가 될 것이네.”였다.

 

 

 

참칭 보수

 

 

 

한국에 보수 세력은 있으나 보수 이념은 없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다.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는 세력은 있으나, 그 지키려는 가치에 대한 합의는 없다는 뜻이다.

 

한국의 보수는 상황적 보수다. 지켜야 하는 가치에 대한 원칙없이, 눈 앞의 이득과 정권을 위해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하여 헤쳐모이는 것이 한국적 보수다. 

까놓고 말하면 한국적 보수는 이권 利權-기득권 연합체다.

 

 

최근까지 애국보수의 깃발을 날리며 좌충우돌하는 변희재를 보자. 얼마전까지 법전을 들고 유사 법조인 행세를 하던 이 장년은 지금 고깃집과 일대 ‘성전’ 중이다. 

300만원의 고기값을 두고 벌이는 이 성전 아래에 구겨 던져진 ‘애국’과 ‘보수’는 가련하기 짝이 없다. 이들이 지키는 ‘가치’ 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

 

 

종북척결은 수십년전 냉전 속에 정치.사회적으로 북한이 우리의 위협이 될 때나 가치있던 개념이다.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사회적. 군사적인 모든 지표에서 북한을 압도한지 오래인 지금, 

종북을 척결하자는 이 이념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아파트 양도.취득세만 인상돼도 난리가 나는 나라에서, 토지의 소유권이 대부분 국유화되어 있는 북한의 체제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만부당한 일이다.

한창 해산심판중인 통합진보당의 내란 음모사건만 봐도, 국회의원까지 가담한 공당의 내란.음모가 장난감 총에 기댄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 종북을 무슨 볼트모트와 암혹세력마냥 과장하여 호들갑 떠는게 가당한 일인가?

 

 

 

오히려 변희재류의 정치폭력배들이 겨루는 종북의 칼날은 자신들의 보수주의적인 자유주의 가치를 향한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정치.결사의 자유, 평화통일을 향한 자유 ...등등 남한의 정치체제가 북한보다 우월하다는 ‘전제’ 속에 이뤄지는 모든 논의들 말이다. 

이들은 사람의 오래된 본성을 강요한다. 두려움이다. 민족의 핏속 깊숙이 자리잡은 동족상잔의 비극과 기억들을 자극하여, 의심과 증오의 감정을 덧 씌운다. 

마치 사람들의 두려움을 먹고, 제 몸 집을 키우는 괴물처럼, 이들은 공포를 키워 제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이들을 참칭보수, 또는 짝퉁보수로 확신하는 이유다.

 

 

 

한국의 보수정당들

 

 

 

지난 18대 대선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자칭 보수당인 새누리당과 자칭 진보당인 민주당의 정책 노선의 차이가 더욱 좁혀졌다는 것이다. 

박근혜, 문재인이 대선 직전에 내어놓은 10대 공약만 봐도, 10가지 중에 5가지가 같을 정도로 정책적인 차이를 찾기 힘들었다. 

두드러진 점은, 보수당과 진보당을 나누는 시금석인, 재벌개혁, 복지, 노동분야에서조차 양당이 내어놓은 공약이 비슷했다는 점이다. 

우파의 특징을 온건개혁, 자유주의, 자본가 친화적인 속성에서 찾고, 좌파의 특징을 급진개혁, 사회주의, 친노동자 정책에서 찾는 전통적인 분류법에 비추어 보자면 이는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틈만나면 좌파정당과 우파정당이 삿대질을 해대는게 일상인 나라에서 양당이 추구하는 정책이 실상은 같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이, 제퍼슨의 민주(공화당)에서 이념적 분화를 거쳐, 잭슨파와 반잭슨 파, 민주당과 휘그당, 그리고 지금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구도로 자리잡는 여정을 거쳤다면, 

대한민국 정당사는 정권획득을 위한 이합집산의 연속이었다.

 

 

당장 지금 민주당의 뿌리인 평화민주당만 봐도 87년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김대중이 13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대선 한 달 전 급조한 정당이었다. 

이후 평민당의 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는 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김종필의 지역주의 보수 정당인 자유민주연합과 DJP 연합을 했으며, 

노무현의 당선 후 내홍을 겪던 새천년민주당이 열린우리당, 민주당, 대통합민주신당(통합신당)의 부산스런 분화과정을 거치다 민주당으로 다시 합체를 합의한 것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2007년 11월 이었다.


중도이면서 개혁 정당이고, 자유주의이면서 사회주의 정당인, 대통합과 경제민주화를 지향하고, 중산층과 서민친화적 정책을 펴는, 

증세없는 보편적 복지를 꿈꾸는 마치 시대의 온갖 암울과 비탄을 한데 모은 것 같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괴기스런 ‘진보적 보수정당’의 등장 이었다.

 

 

 

새누리당을 보자.
새누리당의 뿌리가 박정희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후, 집권을 위해 창당한 민주공화당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헌정체제였던 장면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한 장본인이, 자신의 정당에 체제유지를 기본가치로 삼는 공화당의 이름을 붙인 것은 참 광오한 일이다. 

하긴 박정희 암살 후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이 자신이 주축이 되어 만든 정당을 민주정의당으로 작명한 것을 보면, 후안무치는 이 자들의 ‘종특’일지도.

 

 

군사괴뢰정당인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것은 노태우 정권하의 민주자유당 때 부터다. 

여소야대에 몰려 물태우로 불리던 노태우가 정국타개를 위해 비밀리에 보수대연합을 추진하여 대선패배와 단일화 실패로 핀치에 몰려있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합당에 성공한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였던 김영삼의 영입과, 대통령이 된 김영삼의 5공 청문회에 힘입어 이 당은 군사괴뢰정당에서 유사보수정당으로 성공적인 탈바꿈을 한다. 

이후 김영삼은 96 년 4월 총선을 앞두고 5공화국 세력인 민정계와 신민주 공화계를 축출하고, 5공화국 색채가 강한 민주자유당 대신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한다.


신한국당이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개정하게 된 것은 IMF 등의 여파로 대선정국이 불리했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한 달 전이었고,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것은, 

서울시장선거개입사건(선관위 디도스 테러)와 국회의장 돈봉투 사건으로 한나라당이 그로기에 몰린 2012년 2월이었다. 총선을 2달 앞에 둔 시점이었다.

 

 

마치 월드컵처럼 4년마다 한번씩 당명을 바꾸는 이 두 당의 기구한 인생역정의 특징은 ‘자기부정’이다. 대표적인 것이 여소야대 국면전환을 위한 민자당과 통일민주당의 합당과, 

15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과의 연합(DJP연합), 그리고 개혁의 기치를 들고 뛰어나갔던 열린우리당의 민주당으로의 회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정당들이 가치연합이 아닌 선거연합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거연합을 위한 개혁적 보수야당들의 ‘야합’의 결과는 개혁성의 상실이었다. 

민주화만을 위해 죽자살자 달려오다 막상 민주화에 골인하고 보니, 그 뒤의 목표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민주화 후의 한국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플랜도 없이 방향성을 상실한채 우왕좌왕하다보니, 남는 것은 생존을 위한 ‘자기보존의 본능’ 뿐 이었다. 

‘유사보수정당’인 새누리당과 ‘유사진보정당’인 민주당의 양당 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현재 진보의 가장 큰 정체성인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폐혜의 극복’에 대해 사실상 입장 차이가 없는 보수당들만이 살아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정당들로 이뤄진 그들만의 리그가 왜 나쁠까.
수구이면서 보수인체 하는 ‘유사보수정당’과 보수이면서 진보인척 하는 ‘유사진보정당’의 폐악은 사회의 발전을 막는다는 데 있다. 

변화를 위해 사회 구비구비에 끼인 틀림과 다름, 불법과 탈법, 부당과 당위를 두고 벌어져야 하는 치열한 설전들이, 흐릿하게 희석돼 단지 권력만을 위한 ‘정쟁’으로 전락해 버렸다. 

자신이 뭘 추구하는지도 모른채, 그저 스스로의 당선과 다른 이의 낙선 만을 바라는 괴물들만 남긴 채.

‘변화의 수단을 가지지 않는 국가는 국가를 보존하는 수단을 가지지 않은 것’이란 보수주의의 대부 에드먼드 버크의 경고는 섬찟하다. 보존의 수단이 없는 사회는 필멸한다.

 

 

 

이번엔 미국

 

 

 

1826년 7월 4일. 미국 메사추세츠 브레인트리.

 

 

"Thomas ... Jefferson.. still.. surv..."

“그 놈보다 먼저 죽으면 안되.는.데...”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제2대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의 마지막 말은 라이벌인 토마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보다 먼저 죽으면 안된다는 푸념이었다.


애초 애덤스와 제퍼슨은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함께 싸우던 절친한 동지였다. 

주변의 반대를 무릎쓰고 자신보다 7살이나 아래인 제퍼슨에게 미국 독립선언문의 작성을 맡길 정도로 애덤스는 제퍼슨의 능력을 신뢰했다.

그런 이 둘이 갈라서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정체성에 관한 그들의 견해차였다.

 

 

갓 독립한 신생국가인 미국이 빠르게 발전하기 위해서 상공업의 발전과 그를 뒷받침할 강력한 중앙정부의 리더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애덤스가 

각 주의 자치권한보다 연방정부에 권한이 더 집중되어야 한다고 믿는 연방주의자였던 반면, 

제퍼슨은 연방정부보다는 주 정부, 강한 군대 보다는 최소한의 방위에 필요한 작은 군대, 상공업 진흥보다는 농업을 중시하는 반연방주의자 였던 것이다. 

급기야 서로를 ‘무모하고 성미가 급하며 오직 지배하는 데만 관심 있는 인간(애덤스)’, ‘지적·도덕적으로 가장 교활한 짐승 같은 인간(제퍼슨)’이라고 헐뜯을 정도로 악화되었던 이 둘의 갈등은 

제2대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서 애덤스가 이겨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현실화된다. 

법제상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한 제퍼슨이 부통령에 취임하게 된 것. 애덤스의 임기내내 이 둘은 각종 정부정책에서 사사건건 충돌하며 반목을 겪는다. 

근대판 패트리어트 법인 외국인 규제법의 역풍과 명분없던 프랑스와의 전쟁의 여파로 재선에 패한 애덤스가, 제퍼슨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주고 낙향하기 전 날, 

애덤스는 임기내내 제퍼슨을 괴롭힐 연방주의자 판사들로 법원을 채운다.

 

 

 

이후 10여년이 넘게 기별조차 없을 정도로 앙숙으로 지내던 이 둘은 말년에 애덤스가 보낸 편지 한 통으로 다시 교류를 시작한다. 

죽기직전까지 1백 58통에 달하는 서신왕래의 첫 물꼬는 이렇게 시작된다.

 

 

"You and I ought not to die before we have explained ourselves to each other."

“자네와 나는 서로를 이해시킬 때까지 죽어서는 안되네”

 

 

 

 

같은 날인 1826년 7월 4일. 미국의 광복절인 독립기념일 날. 버지니아 샬러츠 빌.

 

애덤스보다 30분 먼저 세상을 뜬 또 한 명의 미 건국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이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할 때 남겼던 말은 다음과 같다.

 

 

“의견의 차이가 원칙의 차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원칙을 함께 하는 형제들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공화주의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방주의자입니다.”

 

 

제퍼슨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에서 분화된 연방파와 공화파가, 잭슨파와 반 잭슨파, 민주당과 휘그당을 거쳐 현재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자리잡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 합중국의 정체성과 미래, 보수이즘과 진보이즘을 두고 벌어지는 두 정당들의 피터지는 싸움은, 

태어난지 겨우 백여년에 불과한 이 신생국가를 팍스 아메리카라 불리는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올려놓게 된다.

 

 

 

동종교배 중인 한국의 보수주의

 

 

 

현재 한국적 보수주의의 참상은, 반反보수적인 유사보수정당과 보수적인 유사진보정당이 보혁 保革 다툼을 벌이는데 있다. 

반反개혁적인 정당과 비非 개혁적인 정당이 모여 혁신을 외치니 참칭보수같은 파리떼가 꼬이는 것이다.

쿠데타와 반란이라는 과거 새누리당의 반동적인 행태는 차치하더라도, 최근 1년 동안 NLL 대화록, 국정원 대선개입, 군 대선개입 등을 통해 이 당이 보여준 입장은 무척 우려스럽다. 

대화록에 없는 허위사실로 전직 대통령을 모함하고, 그 모함한 사실이 적국인 북한에 이로운 내용이었으며, 국가기관과 군이 대선에 개입하여 헌정체제를 유린했고, 

당사자인 군 장성출신들은 영전을 거듭하고 있다. 게다가 이에 대한 진상조사와 처벌조차 검찰과 법원에 대한 적극적인 사법방해로 무력화 시키고 있다. 

새누리당의 이 이적행위들과, 현재 정당해산심판 중인 통합진보당의 장난감 총 중 어느 것이 더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헌정체제에 위협적일까. 

행위만을 놓고 보면 이들이야말로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적도’들이다.

 


게다가 식민사관이라니. 조선의 물화를 수탈하기 위해 지은 사회자본이 추후 한국의 사회자본을 늘리는데 도움이 됐다면, 

극악무도한 성범죄 덕에, 경찰인력의 재배치로 성범죄자 검거율이 높아진다면 성범죄자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해야 할까.

 

 

뭣보다 자신의 뿌리가 일제의 식민정부에 있다는 정당이, 전통의 유지를 기본 정체성으로 삼는 보수정당이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 당의 가치는 지킬 것이 없어 보인다.

 

 

 

흔히 민주당을 진보정당으로 오인하는 이유는 새누리당에 비해 비교적 개혁적인 민주당의 노선 때문이다. 개혁은 ‘진보만의 속성’이라는 편견이다. 

보수가 개혁을 지양한다는 것은 오해다. 보수와 개혁은 반대 개념이 아니다. 보수도 개혁한다. 보수는 보존하기 위해 개혁한다. 지킬것을 지키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개혁에 있어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변화의 속도다. 보수는 되도록이면 변화의 속도를 느리게, 진보는 변화의 속도를 빠르게 가져가려 한다. 

보수가 두려워 하는 것은 변화의 결과인 개혁의 과정을 통해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다. 변화를 통해 더 나은 결과가 아닌, 더 나쁜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불확실성을 보수는 경계한다. 

이런 면에서 진보는 낙관적이다. 변화를 완전한 사회로 가기 위한 단계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제 사회분야에 대한 민주당의 정책이다. 이번 외국인투자 촉진법의 개정에서 다시 극명하게 나타났듯이 민주당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입장’은 새누리당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진보를 장은주 교수의 표현대로“‘지금, 여기'의 사회적 정치적인 삶의 현실에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정의할 때, 

이 시대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적극적 극복을 뺀 진보정책이란 무의미하다. 민주당을 보수정당으로 단정하는 이유다.

 

 

현재 한국적 보수주의의 위기는 이 두 유사정당들의 정치적 동종교배에 있다. 정권획득과 이권 -기득권 연합을 위해 이합집산과 선거연합의 근친상간을 반복하면서 이들의 노선은 점점 닮아 간다. 

동종교배가 열성유전자를 낳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정설이고, 이는 정치.사회적으로도 성립한다. 견제하지 않고, 견제받지 않는 소수들로 이뤄진 귀족정의 시대로 퇴화하는 것이다.

 

 

 

다시 제퍼슨

 

 

 

“의견의 차이가 원칙의 차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원칙을 함께 하는 형제들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공화주의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방주의자입니다.”

 

 

 

의견의 차이가 원칙의 차이가 아니라는 제퍼슨의 취임사는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바로 공화주의적 가치다. 

제퍼슨은 연방주의자건 반연방주의자건, 잭슨파건 반잭슨파건,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간에 이견의 차이를 넘어 전제된 중요한 합의가 있다고 강조한다. 

바로 공공선을 향한 시민의 의무다. 

공정한 질서와 제도를 통해 불평등과 부패를 해소하고,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평등을 통해 공동가치와 선이 구현되어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보장할 수 있도록 복무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가 존재하는 의의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 구도가 쒯스러운(x) 불편한 것은 이 두 유사정당들이 지배한 정치지형으로 인해, 공공선을 향한 정작 필요한 보수, 진보에 대한 논쟁들이 분탕질되어 가려진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보수와 진보정당이라 참칭하면서 이들은 몇몇의 특정 성향만을 들어 시민들을 줄 세운다. 

파랑이었다 빨강이 되고, 노랑이었다 파랑이 되는 그 당들의 상징색처럼 몇몇 성향만을 들어 시민을 보수정당 지지자로, 진보정당 지지자로 규정하는 것은 무도한 일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시민이 스스로의 이익에 반하게 투표하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채 유니폼을 받고 어리둥절해하는 시민들을 보고, 이제 너는 우리편이니 저쪽과 대립하라 부추긴다. 

신탁과 반탁, 반공과 용공, 영남과 호남, 민주화와 비민주화의 그늘 속에 숨어 기생했듯, 이제 다시 가짜 보수와 가짜 진보로 시민을 줄 세우려 하는 것이다. 

마치 더 지니어스에 나오는 이상민의 주사위처럼, 시민들에게 5와 6만 나오는 선택지를 던져준 채, 짐짓 경제적 민주화와 이념적 다양성이 만개한 듯 의뭉을 떠는 것이다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에서 에버딘이 위대해지는 것은 화살의 끝으로 서로 죽고 죽이던 경쟁자가 아닌, 판엠의 돔을 겨누면서부터이다.

 

 

‘진짜 적이 누구인지 잊지마!’   

 

 

 

이제 보수주의

 

 

 

보수가 좋냐고? 그렇다. 난 보수도 좋다. 난 인간이성의 한계와 급진적인 개혁이 가져올 불확실성과 혼란을 인정한다. 난 전통의 순기능을 믿으며 때로 편견의 합리성도 수긍한다. 

시대를 통해 모아진 민족의 지혜와 미덕의 총합인 제도들을 통해 옳은 것(the right)과 좋은 것(the good)을 구별하고, 확실한 청사진과 함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보수주의가 뭐냐고?내게 보수주의란 마치니가 말한 저 조국이다.

 

 

조국은 땅이 아니다. 땅은 그 토대에 불과하다. 조국은 이 토대 위에 건립한 이념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사상이며, 그 땅의 자식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다. 

당신의 형제 중 어느 하나라도 투표권이 없어 나라 일에 자신의 의사를 전혀 반영할 수 없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교육받은 자들 사이에서 교육받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는 한,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일할 수 있고 또한 일하고자 하는데도 일자리가 없어 가난 속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내야 하는 한, 당신에게 당신이 가져야만 하는 그러한 조국은 없다. 

모두의, 그리고 모두를 위한 바로 그 조국을 당신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 주세페 마치니,모리치오 비롤리/김경희.김동규 역, 공화주의

 

 

그대들의 보수주의는 뭔가.

 

 

내게 지켜야 할 가치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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